노창성과 아나운서 이옥경의 가족이야기 망우공원 산책 93, 조선 최초 방송인

노찬성의 생애와 방송 활동

노창성(1896~1955, 하치만 창성)은 우리에게 낯선 사람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방송인이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아내 이옥경은 한국 여성 최초의 직업 아나운서였고 딸 노라노(노명자)는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였다.그는 평안북도 철산(의주?)에서 태어난다. 중국 안동현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 1924년 도쿄고등공업학교 전기화학과를 졸업한다. 이때 아내가 된 이옥경을 만나 사귀게 된다. 그는 귀국 후 조선총독부 체신국 기수로 채용돼 경성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기술을 담당한다. 1927년 경성방송국 기술부장을 지냈고, 1931년 경성방송국 기획부장이었으며, 1932년 조선방송협회 사업부장 등을 맡았다. 1938년 초대 함흥방송국장이 됐고 이듬해 경성방송국 한국어방송을 담당한 초대 제2방송부장이 된다. 1943년 경성방송국 사업부장이 되지만 ‘단파방송 밀청사건’으로 방송계를 떠난다. 해방 후에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서 활약했다. 1949년 공보처 서울중앙방송국(KBS) 국장과 1953년 방송업무총괄을 위해 신설된 방송관리국 초대 국장을 맡다가 1955년 지병으로 사망한다.

노창성 사업과 친일활동

그는 상당한 재력가로 1936년 천향각을 차리고 조선실업구락부에 참여한다. 중일전쟁 후에는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지원하는 데 앞장선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 참사를 시작으로 1941년 조선담우협회 고문, 조선문인협회 평의원을 지냈으며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조선임전보국단)에서 활동한다. 그는 성도 일본식 야와타 마사나리로 바꾼다 1943년 방송계를 떠난 뒤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 선전부 문화위원회 위원과 임시 특별지원병제도 익찬위원회 1반 실행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들의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와 친일반민족행위자결정사유서와 관련한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어 있다.

첫 조선 여자 아나운서 이옥경

이옥경(1902?) 한국 최초의 아나운서다. 이 씨는 인천해관관리이자 제령학교 영어강사인 이학인의 외동딸로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 최초의 일본여학교에 들어간다. 목소리 좋고 성악에 재능이 있던 그는 인천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일본여자음악학교에 다니다 중퇴하고 귀국해 노창선과 결혼한다. 일본어에 능숙한 그는 1925년 노창선의 추천으로 경성방송국 아나운서가 된다. 당시 한국인 직원은 기술부에 노창선 한덕봉, 방송 담당 최승일, 그리고 여자 진행자 이옥경 마현경 등 불과 5명 정도였다. 하지만 육아 문제 등으로 오래 근무하지 못하고 1930년 방송사를 떠난다. 남편과의 사이에 9명이나 되는 자식이 있다.

최초의 조선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노명자는 노라노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다. 1967년 화제가 됐던 윤복희의 미니스커트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는 서울 종로(당시 경기 경성부 계동)에서 5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다. 1947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에서 패션디자인을 배워 한국 최초의 여성 패션디자이너가 된다. 1950년 귀국해 서울 명동에 ‘노라노의 집’을 열고 뉴욕 5번가 패션을 한국에 상륙시킨다. 판탈롱과 미니스커트 등을 처음 소개해 국민에게 문화적 충격을 준다. 프랑스 파리에 유학하여 아카데미 줄리앙 아트스쿨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는 1956년 서울반도호텔에서 한국에서 생산된 원단을 사용하여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개최하자 1959년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의상상(Best Dress Award)을 수상하고 1965년 하와이에서 첫 해외 패션쇼를 개최한다. 이후 서울 파리 뉴욕 홍콩 등에서 패션쇼를 개최하거나 법인을 설립한다.

노창성과 이옥경의 묘소

노창성과 이옥경의 합장묘(묘번호 105601)는 망우리 남쪽 산맥(독락정배밭 공원) 아래 언덕에 있다. 차중락과 이용민의 묘 위에 수많은 묘가 있어 넓고 아늑한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무덤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변의 무덤들은 모두 벌초를 해서 말끔히 정비되어 있다. 언덕 속에 수풀이 무성하고 그 안에 망주석이 보인다. 아카시아와 잡초가 무성해 접근이 쉽지 않다. 풀과 나무를 정리하며 다가가면 무덤과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무덤은 온통 덤불로 가득하다. 특히 아카시아 나무가 너무 많아 몸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고 사진 찍기도 어렵다. 봉분과 무덤 앞에는 잔디가 남아 있어 신기할 정도다. 잡초를 치워야 비석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 정면이 ‘광주노공 창성 전주이씨 옥경지묘’로 되어 있다. 비석 뒤로는 가기도 쉽지 않다. 아카시아 가시를 조심하면서 뒤쪽으로 접근해야 한다. 비석의 뒷면에는 유족(4남 5녀, 그리고 배우자와 자녀)의 이름만 있다. 손녀 이름이 스티브 마이클 등 미국식이다. 옆면에는 2명의 사망일(1955년과 1982년)이 적혀 있다. 무덤 뒤로 올라가 보다. 아, 천하의 명점이다. 풍수에는 문외한이지만 참으로 좋은 자리라고 생각된다. 햇볕이 들지 않는 풀숲 속에서도 잔디를 살 수 있다면 좋은 곳임에 틀림없다.

자료,유명한아나운서-경성방송국여성아나운서들-(삼천리,1935.8)

그렇다면 이 여성 아나운서라는 새 직업라인에 처음으로 용감하게 발을 들여놓은 여자는 누구일까.이 여성 아나운서라는 말이 붙어도 당시 조선인들의 귀에 낯설었던 만큼 그녀를 지망하는 여성도 물론 만만치 않았다.즉, 귀여운 지망생 한 명이 있었기에 그는 당시 함께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방송국 사무에 노력을 기울인 노창선씨의 부인 이옥경씨였다.이옥경 씨는 그러면 어떤 분이 도내 조선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가 됐느냐. 그녀는 물론 남편의 깁훈 이해와 지도가 있기 때문에 6명의 겟지맨은 그보다는 그의 어린 딸 시절에 결혼해 그 부인으로서 조선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라는 직무에 질렸다고 봐야 옳을까.그럼 그 어린 딸에는 어떠했는지 그 가정은 어땠어?이 옥교은 씨는 인천에서 나오고, 거기에서 초등 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는 본래 태어난 것을 고귀한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아버지는 당시 인천 세관 관장이라는 전통의 요직에 5명쯤 되지만 그가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어떻게 호화롭게, 또 부모의 사랑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자라고 나갔는지를 능히 짐작된다.아버지가 안동 현 세관 관장으로 전임하게 되고 부모를 이역 만주 안동 현에 가게 됐다.거기에서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에 곳에 사는 동현 고등 여학교에 입학했다.그는 어릴 때부터 붙어 미모의 귀여운 얼굴을 했으며 또 그의 목소리는 밝고 아름다웠다. 그는 초등 학교 시절도 여기 고등 여학교 때도 언제나 학교에서는 선생님 앞으로 집에 와서는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그 목소리를 높이고 불렀다.그렇게 훌륭한 얼굴을 하는 그는 학교에서 공부도 남다르게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그런 그가 또 조선의 여성은 국어가 뛰어나서 잘 알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짐작한 것이었다. 인천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안동 아키라(안 씨)고등 여학교를 마츄은 씨는 그 당시의 조선 여자로서는 드물게 유창하게 흐르는 노 네리는 물처럼 국어를 잘한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은 아니었다.어쨌든 이 옥교은 씨는 학교를 졸업하면 현재 남편인 노·장성 씨와 결혼하게 됐다.당시 할머니는 경성 방송국에 근무하는, 여섯 스니 결혼 후 이 씨가 라디오 방송에 대해서 다소의 지식을 얻은 것도 유의한 것의 하나였던 이 씨는 그렇게 행복한 신혼 생활 속에서도 남편이 되고 있는 그 업무에 포기 신청 이해와 동정을 갖게 된 탓인지 또는 남편의 간절한 충언을 가지고 엿본 탓인지 그는 25세 나이에 가정에서 주부 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경성 방송국 방송실의 마이크 로폰ー 앞을 걷게 됬다.참으로 이제야 보니 그때의 이 씨의 행동은 실로 대담함이 있었다.그때까지는 라디오 청취 층에 조선 사람들은 매우 귀하고 대부분은 일본 국내인이어서 이 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국어는 조금도 불만 없을 만큼 유창하였다.아무리 말도 잘하고 밝은 목소리의 소유자라고 해도 처음 마이크로 폰-전의 얘기가 나오자 말이 막히고, 이야기의 상태가 잘 맞아서 방송하지 않으면 모든 청취자들에 불만을 주고 또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씨만은 그의 소질을 항상 알고 있는지, 천재로 태어나면서인지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매일 마이크로 폰-앞에서 스만 인사를 한다.그의 빛나는 2개의 눈동자, 배 꽃처럼 하얀 피부, 원만의 한 그에게 얼굴, 호리호리한 몸매의 밝은 목소리는 그때의 방송국의 많은 사람들의 눈을 황홀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이후 그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숙명적 운명에 처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정의 복음자리에 다시 들어가 버렸다.지금의 이옥경 씨는 노 씨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5남매인 아기자기한 자식들의 재롱을 벗으며 하루하루를 주부로서 현모양처로 보낸다.

노찬성의 생애와 방송 활동

노창성(1896~1955, 하치만 창성)은 우리에게 낯선 사람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방송인이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아내 이옥경은 한국 여성 최초의 직업 아나운서였고 딸 노라노(노명자)는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였다.그는 평안북도 철산(의주?)에서 태어난다. 중국 안동현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 1924년 도쿄고등공업학교 전기화학과를 졸업한다. 이때 아내가 된 이옥경을 만나 사귀게 된다. 그는 귀국 후 조선총독부 체신국 기수로 채용돼 경성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기술을 담당한다. 1927년 경성방송국 기술부장을 지냈고, 1931년 경성방송국 기획부장이었으며, 1932년 조선방송협회 사업부장 등을 맡았다. 1938년 초대 함흥방송국장이 됐고 이듬해 경성방송국 한국어방송을 담당한 초대 제2방송부장이 된다. 1943년 경성방송국 사업부장이 되지만 ‘단파방송 밀청사건’으로 방송계를 떠난다. 해방 후에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서 활약했다. 1949년 공보처 서울중앙방송국(KBS) 국장과 1953년 방송업무총괄을 위해 신설된 방송관리국 초대 국장을 맡다가 1955년 지병으로 사망한다.

노창성 사업과 친일활동

그는 상당한 재력가로 1936년 천향각을 차리고 조선실업구락부에 참여한다. 중일전쟁 후에는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지원하는 데 앞장선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 참사를 시작으로 1941년 조선담우협회 고문, 조선문인협회 평의원을 지냈으며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조선임전보국단)에서 활동한다. 그는 성도 일본식 야와타 마사나리로 바꾼다 1943년 방송계를 떠난 뒤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 선전부 문화위원회 위원과 임시 특별지원병제도 익찬위원회 1반 실행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들의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와 친일반민족행위자결정사유서와 관련한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어 있다.

첫 조선 여자 아나운서 이옥경

이옥경(1902?) 한국 최초의 아나운서다. 이 씨는 인천해관관리이자 제령학교 영어강사인 이학인의 외동딸로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 최초의 일본여학교에 들어간다. 목소리 좋고 성악에 재능이 있던 그는 인천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일본여자음악학교에 다니다 중퇴하고 귀국해 노창선과 결혼한다. 일본어에 능숙한 그는 1925년 노창선의 추천으로 경성방송국 아나운서가 된다. 당시 한국인 직원은 기술부에 노창선 한덕봉, 방송 담당 최승일, 그리고 여자 진행자 이옥경 마현경 등 불과 5명 정도였다. 하지만 육아 문제 등으로 오래 근무하지 못하고 1930년 방송사를 떠난다. 남편과의 사이에 9명이나 되는 자식이 있다.

최초의 조선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노명자는 노라노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다. 1967년 화제가 됐던 윤복희의 미니스커트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는 서울 종로(당시 경기 경성부 계동)에서 5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다. 1947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에서 패션디자인을 배워 한국 최초의 여성 패션디자이너가 된다. 1950년 귀국해 서울 명동에 ‘노라노의 집’을 열고 뉴욕 5번가 패션을 한국에 상륙시킨다. 판탈롱과 미니스커트 등을 처음 소개해 국민에게 문화적 충격을 준다. 프랑스 파리에 유학하여 아카데미 줄리앙 아트스쿨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는 1956년 서울반도호텔에서 한국에서 생산된 원단을 사용하여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개최하자 1959년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의상상(Best Dress Award)을 수상하고 1965년 하와이에서 첫 해외 패션쇼를 개최한다. 이후 서울 파리 뉴욕 홍콩 등에서 패션쇼를 개최하거나 법인을 설립한다.

노창성과 이옥경의 묘소

노창성과 이옥경의 합장묘(묘번호 105601)는 망우리 남쪽 산맥(독락정배밭 공원) 아래 언덕에 있다. 차중락과 이용민의 묘 위에 수많은 묘가 있어 넓고 아늑한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무덤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변의 무덤들은 모두 벌초를 해서 말끔히 정비되어 있다. 언덕 속에 수풀이 무성하고 그 안에 망주석이 보인다. 아카시아와 잡초가 무성해 접근이 쉽지 않다. 풀과 나무를 정리하며 다가가면 무덤과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무덤은 온통 덤불로 가득하다. 특히 아카시아 나무가 너무 많아 몸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고 사진 찍기도 어렵다. 봉분과 무덤 앞에는 잔디가 남아 있어 신기할 정도다. 잡초를 치워야 비석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 정면이 ‘광주노공 창성 전주이씨 옥경지묘’로 되어 있다. 비석 뒤로는 가기도 쉽지 않다. 아카시아 가시를 조심하면서 뒤쪽으로 접근해야 한다. 비석의 뒷면에는 유족(4남 5녀, 그리고 배우자와 자녀)의 이름만 있다. 손녀 이름이 스티브 마이클 등 미국식이다. 옆면에는 2명의 사망일(1955년과 1982년)이 적혀 있다. 무덤 뒤로 올라가 보다. 아, 천하의 명점이다. 풍수에는 문외한이지만 참으로 좋은 자리라고 생각된다. 햇볕이 들지 않는 풀숲 속에서도 잔디를 살 수 있다면 좋은 곳임에 틀림없다.

자료,유명한아나운서-경성방송국여성아나운서들-(삼천리,1935.8)

그렇다면 이 여성 아나운서라는 새 직업라인에 처음으로 용감하게 발을 들여놓은 여자는 누구일까.이 여성 아나운서라는 말이 붙어도 당시 조선인들의 귀에 낯설었던 만큼 그녀를 지망하는 여성도 물론 만만치 않았다.즉, 귀여운 지망생 한 명이 있었기에 그는 당시 함께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방송국 사무에 노력을 기울인 노창선씨의 부인 이옥경씨였다.이옥경 씨는 그러면 어떤 분이 도내 조선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가 됐느냐. 그녀는 물론 남편의 깁훈 이해와 지도가 있기 때문에 6명의 겟지맨은 그보다는 그의 어린 딸 시절에 결혼해 그 부인으로서 조선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라는 직무에 질렸다고 봐야 옳을까.그럼 그 어린 딸에는 어떠했는지 그 가정은 어땠어?이 옥교은 씨는 인천에서 나오고, 거기에서 초등 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는 본래 태어난 것을 고귀한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아버지는 당시 인천 세관 관장이라는 전통의 요직에 5명쯤 되지만 그가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어떻게 호화롭게, 또 부모의 사랑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자라고 나갔는지를 능히 짐작된다.아버지가 안동 현 세관 관장으로 전임하게 되고 부모를 이역 만주 안동 현에 가게 됐다.거기에서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에 곳에 사는 동현 고등 여학교에 입학했다.그는 어릴 때부터 붙어 미모의 귀여운 얼굴을 했으며 또 그의 목소리는 밝고 아름다웠다. 그는 초등 학교 시절도 여기 고등 여학교 때도 언제나 학교에서는 선생님 앞으로 집에 와서는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그 목소리를 높이고 불렀다.그렇게 훌륭한 얼굴을 하는 그는 학교에서 공부도 남다르게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그런 그가 또 조선의 여성은 국어가 뛰어나서 잘 알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짐작한 것이었다. 인천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안동 아키라(안 씨)고등 여학교를 마츄은 씨는 그 당시의 조선 여자로서는 드물게 유창하게 흐르는 노 네리는 물처럼 국어를 잘한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은 아니었다.어쨌든 이 옥교은 씨는 학교를 졸업하면 현재 남편인 노·장성 씨와 결혼하게 됐다.당시 할머니는 경성 방송국에 근무하는, 여섯 스니 결혼 후 이 씨가 라디오 방송에 대해서 다소의 지식을 얻은 것도 유의한 것의 하나였던 이 씨는 그렇게 행복한 신혼 생활 속에서도 남편이 되고 있는 그 업무에 포기 신청 이해와 동정을 갖게 된 탓인지 또는 남편의 간절한 충언을 가지고 엿본 탓인지 그는 25세 나이에 가정에서 주부 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경성 방송국 방송실의 마이크 로폰ー 앞을 걷게 됬다.참으로 이제야 보니 그때의 이 씨의 행동은 실로 대담함이 있었다.그때까지는 라디오 청취 층에 조선 사람들은 매우 귀하고 대부분은 일본 국내인이어서 이 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국어는 조금도 불만 없을 만큼 유창하였다.아무리 말도 잘하고 밝은 목소리의 소유자라고 해도 처음 마이크로 폰-전의 얘기가 나오자 말이 막히고, 이야기의 상태가 잘 맞아서 방송하지 않으면 모든 청취자들에 불만을 주고 또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씨만은 그의 소질을 항상 알고 있는지, 천재로 태어나면서인지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매일 마이크로 폰-앞에서 스만 인사를 한다.그의 빛나는 2개의 눈동자, 배 꽃처럼 하얀 피부, 원만의 한 그에게 얼굴, 호리호리한 몸매의 밝은 목소리는 그때의 방송국의 많은 사람들의 눈을 황홀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이후 그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숙명적 운명에 처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정의 복음자리에 다시 들어가 버렸다.지금의 이옥경 씨는 노 씨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5남매인 아기자기한 자식들의 재롱을 벗으며 하루하루를 주부로서 현모양처로 보낸다.

▲이옥경 아나운서 –

▲이옥경 가족사진

▲ 이옥경 딸 노라노

무덤 입구

비석(앞)

비석(뒷면)

아카시아로 뒤덮인 무덤 풀, 풀, 후(10월 7일) 사진